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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명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생애와 명언

by 성공힐러 2025.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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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소녀, 루스

1933년 3월 15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루스 조앤 베이더가 태어났다. 유대계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그는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했고, 어머니 셀리아의 영향 아래서 자기절제와 학문에 대한 집념을 배웠다. 어머니는 대학 진학을 꿈꿨으나 현실적 제약으로 이루지 못했고, 그 꿈을 딸에게 넘겼다. 셀리아는 루스에게 언제나 말했지. “분노에 휘둘리지 말고, 독립적인 여성이 되라.” 그 말은 루스의 인생 전반을 이끄는 신념이 되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을 하루 앞두고 어머니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루스는 눈물을 삼킨 채 졸업식에서 최우수 학생 대표 연설을 했다. 그는 그날 이후로 약해지지 않았다. 법이라는 이름의 언어로 세상과 싸우기로 결심했다.

 

2. 아이비리그, 그 벽을 넘다

1954년, 루스는 코넬 대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그해 동급생인 마틴 긴즈버그와 결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버드 로스쿨에 진학했다. 당시 하버드는 여성 입학생 500명 중 단 9명만이 여성이었고, 교수들은 공공연히 “남자의 자리를 왜 여자가 차지하냐”고 물었다.

남편 마틴이 암으로 투병할 때, 루스는 병간호와 육아, 학업을 병행하면서도 전 과목 수석을 유지했다. 마틴이 뉴욕에서 일자리를 얻자, 그는 하버드를 떠나 콜롬비아 로스쿨로 옮겼고, 다시 수석으로 졸업했다. 여성 최초로 콜롬비아 로스쿨 학보의 편집장을 맡았다.

그러나 졸업 후 고용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는 대법원 서기로 지원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했다. 당시 여성 법률가에 대한 편견은 뿌리 깊었고, 루스는 그것을 깨부술 칼을 법전에서 찾기로 했다.

3. 법정에서의 혁명가, 루스

1970년대, 그는 미국시민자유연맹(ACLU) 산하 여성 권리 프로젝트를 설립했고, 여성차별 사건을 연이어 승소했다. 전략은 명확했다. 여성뿐 아니라 남성의 차별사례까지 끌어들여, 성별에 기반한 차별이 헌법에 어긋난다는 것을 입증했다.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는 'Weinberger v. Wiesenfeld'(1975) 사건이었다. 남편이 아내를 잃고 유족 연금을 신청했지만, 법은 여성이 유족일 때만 연금을 지급하도록 돼 있었다. 그는 법정에서 말했다.
“이 사건은 여성의 권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남성도 돌봄을 선택할 자유를 가져야 한다.”
결과는 승소. 대법원은 만장일치로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성차별을 법으로부터 조용히, 철저히 제거하는 혁명이 시작된 셈이다.

4. 대법관 긴즈버그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의 지명으로 미국 대법원에 오르며, 역사상 두 번째 여성 대법관이자 첫 유대계 여성 대법관이 되었다. 당시 그는 진보와 보수 양 진영 모두로부터 신뢰를 받았고, 상원 인준 투표에서 96대 3이라는 압도적 지지를 얻었다.

재판정에서 그는 언제나 논리적이고 간결한 언어로 헌법의 언어를 해석했다. 단순히 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법의 맥락과 진화를 읽어내는 데 능했다. 보수적 다수 의견에 맞서 소수 의견을 쓸 때도 그는 침착했고, 종종 그 소수 의견이 시간이 지나 다수의 법리가 되었다.

특히 2007년의 ‘Ledbetter v. Goodyear’ 사건에서의 반대 의견은 후에 ‘Lilly Ledbetter 공정임금법’의 입법 근거가 되었다.
“차별은 하루아침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인생 전체를 바꾼다.”
그의 문장은 곧 정책이 되었고, 현실을 바꾸는 언어가 되었다.

5. ‘노토리어스 RBG’라는 별명

그는 대법관이었지만 동시에 하나의 문화 아이콘이었다. 흑인 래퍼 ‘노토리어스 B.I.G’에서 따온 ‘노토리어스 RBG’라는 별명은, 법정에서의 그의 강직함과 정적에 대한 냉철한 대응에서 비롯됐다.

항암 투병 중에도 단 한 번도 업무를 중단하지 않았고, 훈련된 발레리나처럼 절제된 몸짓과 철저한 시간관리를 보여줬다.
팬들은 그의 소수 의견이 실린 판결문을 읽으며 응원을 보냈고, 그의 법복 위에 덧댄 레이스 장식의 깃은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6. 명언으로 남은 철학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언어는 법조문처럼 차갑고 명확하면서도, 삶의 방향을 정해주는 나침반처럼 따뜻했다.
그가 남긴 말 중 가장 유명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진정한 변화는 당신의 삶의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는 모든 여성들이 그들이 원할 때, 그리고 준비되었을 때, 맨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싸우되, 사람들이 내 싸움을 귀 기울이게 만들고 싶다."
"소수 의견은 훗날 역사를 바꿀 다수의 씨앗이 된다."

이 명언들은 그저 멋진 말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말한 대로 살았고, 말한 만큼 세상을 바꿨다.

7. 죽음 이후에도 남은 유산

2020년 9월 18일, 그는 췌장암으로 별세했다. 미국 전역은 애도했고, 미국 역사상 최초로 국회의사당에 안치된 여성 대법관이 되었다. 장례식에는 수많은 이들이 몰려들었고, 수천 개의 ‘감사합니다 RBG’ 팻말이 줄지어 섰다.

그가 남긴 건 판례와 명언만이 아니었다.
‘침착하되 절대 굴복하지 않는 태도’,
‘목소리는 작아도 영향력은 깊을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논리를 무기로 한 변화’의 가능성.

그의 삶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여성과 소수자, 정의를 꿈꾸는 이들에게 등대가 되었다.

 

8. 우리는 왜 지금 RBG를 다시 말해야 하는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단지 여성의 권리를 위한 투사가 아니었다. 그는 헌법의 보편성과 탄력성, 그리고 그것이 구체적 현실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끊임없이 실험한 사상가였다.

지금 우리가 RBG를 말하는 이유는 단순한 추모가 아니다.
그가 남긴 법의 윤리,
그가 보여준 침착한 저항의 미학,
그리고
그가 증명한 말의 힘을 다시 붙잡기 위해서다.

그는 말했지.
“당신이 가진 특권을, 누군가의 기회를 여는 데 써라.”
그 한 문장이,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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